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K-콘텐츠의 성공과 자본주의적 보편성

아카데미의 늪

by 비관자 2022. 9. 14. 00:51

본문

한국 문화의 역사에서 기념이 될 만한 일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팬덤 현상 및 아이돌 산업에 대한 별도의 분석이 필요할 BTS, 블랙핑크 등의 세계적 인기몰이와는 별개로,

서사가 중심이 되는 문화콘텐츠에 대해서는, 단순한 찬사나 거북한 '국뽕'을 넘어서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 놓여있다.

 

K-콘텐츠 자체의 가치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거둔 성과는, 많은 언론이나 식자들이 이미 (과도할 정도로 쏟아내듯) 그 자체로 뛰어난 것임이 분명하다.

이 작품들은 (<오징어게임>은 제대로 감상하지 않았으니 주로 <기생충>에 한정된 것이지만,) 대중적인 문화상품이 가져야 할 덕목들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충분한 정도로는 갖추고 있는 듯하다.

 

<기생충>에서 나타나는 서사와 미장센, 그리고 쇼트들과 시퀀스들이 보여주고 있는 운동의 조화는, 영화 예술에 그리 조예가 깊지 않은 나 같은 감상자들에게도 인상깊은 것이었다. 지나치게 도식적인 '반지하' 비유가 아쉽다면 아쉽겠으나, 그것이 "명문대 출신 감독"의 망상이 아니라는 것은, 불과 얼마 전 폭우 가운데의 일가족 사망 사건을 통해 비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예술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그러니까 순수한 '미'에 값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순수 미학주의자'들에게는 유감스럽지만, 예술은 오히려 <기생충>과 같은 것일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삶에 의미를 지니는 아름다움의 집적체가 되는 것이리라. 아카데미에 자신의 공고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유유자적하는 유미주의적 평론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마디: 퉤!

 

자본주의적 보편성과 한국 사회

 

사실, 나름대로 비판적이고 진보적이라는 평론가들이나 언론 지면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는 바에 주목하는 것이, 오히려 저 성공적인 K-콘텐츠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넘어서는 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드러나는, 가혹한 자본주의의 보편성.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에 대한 각론에서는 심심치않게 등장했던,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해석은, 이 작품들이 거둔 성과에 도취된 가운데 뒤편으로 사라지고 잊히는 듯하다.

 

아카데미상이나 에미상 같은, 콘텐츠 산업의 중심지 미국에서 유의미한 상을 받았는데, '찬물을 끼얹는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식자들의 일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나. 물론, 간혹가다 등장하는 '프로불편러'들이 제기하듯,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의 수상이 전적으로 '구색 맞추기', 미국 콘텐츠 업계의 'PC함 보여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디즈니류의 보여주기식 'PC'는 때때로 역겨움을 자아낼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보여주기조차 실제로 배제되어왔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신경쓸 수밖에 없는' 상황의 산물이라는, 복합적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청년 연구자들'에게 오히려 문제는, 마블의 유색인종이나 여성(혹은 둘 다인) '영웅'에게 도취되어, 그것이 어디까지나 미국적인 영웅서사를 관철시킨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는 것에 있다.]

 

여하튼, 전세계적 성취를 거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가혹할 정도로 그려내고 있다. <기생충>에서, 반지하에 살고 있는 주인공 가족과 호화 주택의 지하 밀실에 숨어 사는 가정부 가족은, 결국 연대하지 못하고 파국적 결말로 향한다. 주어진 배경을 보면 훨씬 더 가혹했던 <설국열차>에서 언뜻 보이던 희망은, 지하에 살던 사람들이 적절하게 타협했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기생충>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기야, 그들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을지라도, 결국 살아남은 그들은 목숨을 걸고 <오징어게임>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자본주의적 보편성을 첨예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치만 삐끗해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한국 사회가 이 K-콘텐츠에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 자체가 뛰어난 문화상품/예술작품을 산출할 수는 없다. 적절한 문제의식의 가지고 적절한 예술적 기법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창작자(들), 그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력들, 그리고 특히나 여기에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는 자본 역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영화 혹은 드라마 생산의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는 이 두 범주의 요소가 공존한다. 한편의, 폭우 속 잠겨오는 반지하에서 살고자 애쓰다 숨진 노동자와 아이, 그리고 장애가 있는 가족. 배달 건수를 더 채우고자 아슬아슬하게 달리다가 비명횡사하는 노동자들. 다른 한편의, 역량을 갖춘 콘텐츠 생산자, 명망 있는 그들의 작업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문화예술 노동자들, 자기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본(물론, 이 나라 정치권력의 천박함으로 인해, 넷플릭스 같은 외국 자본이 역할을 해주기도 해야 하지만).

 

야수에서 전략가로

 

이런 두 범주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한국에서 '성공적인' K-콘텐츠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적 보편성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내는 현장이 바로 이 나라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시초 축적'의 시기를 경과하여 '성숙한' 자본은, 더 이상 야수가 아닌 듯하다. 사람들의 경제적이고 정치적 삶도 나아진다. 사람들은 굶지 않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정도로는 교육받으며, 정치적 자유도 어느 정도 보장된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 조건은 오히려 더 나빠져서, 목숨을 걸고 고공에 오르거나, 스스로 만든 철창에서 절규해야 겨우 그것을 개선해달라는 요구를 '전달' 할 수 있고, '상류층'들이 아이들의 '스펙'을 만들어주고 있을 때 '하류층'은 아이들이 온라인 수업에 제대로 접속을 했을지를 걱정해야 하고, 4~5년에 한 번 선출한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자를 통제하기는 꽤나 힘든 일이다.

 

아마도, 나름대로 진전된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정치적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보편성, 그러니까 언제나 누군가를 착취해야만 유지되는 보편성. 이 보편성이 꽤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게 한국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적절한 콘텐츠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마치 이 사회가 자신의 모순을 문화예술작품/상품으로 '승화'시키는, 사회 전체의 심리적 과정이 아닌가. 문제는, 이 승화는 억압의 진정한 해결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는 개인의 삶에서는 승화가 최선일 수 있겠지만, 억압되고 있는 문제를 정말로 해결할 수 있다면 문제 자체를 없애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무식한' 야수가 아니라 '교활한' 전략가의 모습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다. K-콘텐츠의 잠재성과 성과를 문화산업자본이 모두 향유하게 내버려두기에는, 그 근본적 '재료'가 되었던 우리의 삶이, 우리 자체가 억울하지 않을까. 희망을 상실한 봉준호 감독에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이상한' 캐릭터들이 배제되지 않는 세상이 진짜 가능하다고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우리의 응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선, 빌어먹을 자본주의적 보편성에 침이라도 뱉자: 퉤!

관련글 더보기